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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풀어쓰는 영신수련] (22) 죽기까지 사랑했노라
    부산평화방송  작성일 2015.06.03  조회 835     
[쉽게 풀어쓰는 영신수련] (22) 죽기까지 사랑했노라
발행일 : 2015-05-31 [제2946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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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신수련 셋째주간인 수난 주간에 들어갑니다. 최후의 만찬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천천히 관상해 나갑니다.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예수님 행적을 따라가며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 수난을 생각하면 슬픔, 고통, 내 죄, 아픔, 눈물, 통회, 속죄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길을 걷거나 예수님 수난을 주제로 기도하게 되면 큰 슬픔과 아픔을 맛보며 눈물을 흘리고 괴로움에 잠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의 수난이기에 그런 슬픔과 아픔을 자연스레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런 슬픔과 고통에만 초점을 맞춰 알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오히려 수난 신비의 깊은 차원을 잃어 버릴 위험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난에 대해 기도할 때는 곡소리부터 내려고 하지 마라고 주문합니다. 무조건 슬픔과 애통에 떨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어느 기도에서와 같이 수난에 대한 관상기도에서도 기본적으로는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고 보여 주시는 대로 따라갈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오히려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기쁨에 차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난을 대하면서 내 죄때문에 예수님께서 이토록 극심한 고통을 받으시며 내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다고만 생각하면 다소 초점이 어긋난 것 아닌가 합니다. 그런 죄와 속죄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강조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죄와 죄값인 속죄의 바탕에도 우리를 향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함에도 이 경우엔 그 사랑이 무겁게 다가오고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들고 주눅들게 만드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를 살려 내고 해방시키고 꿈을 꾸게 만들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사랑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 사랑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공생애 전체를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이적들을 행하시며 당신 사랑을 드러내 보여 오셨습니다. 허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는 그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시며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랑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당신 목숨을 내어 놓으면서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며 나름대로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자기 목숨을 내놓는 데까지 사랑해 본 체험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알아듣기가 그만큼 어려워집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허공을 멤돌 메아리같은 그 말씀을 당신은 참으로 실재하는 진리로서 보여 주십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에고 시스템에 떨어져 있고 참된 진리에 대해선 오히려 적대적인 사람들까지도 끌어안으시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들이 사람의 참된 모습이 아님을, 당신 목숨을 걸고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그 속에 있는 영혼들이 인간의 참된 모습임을 가르치시며, 극단적인 악까지도 끌어안아 버리심으로써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몸 차원에서만 알아들어선 곤란합니다. 채찍질과 가시관으로 몸이 짓이겨졌다고, 그 고통이 수난의 핵심이라고 알아듣고 있어선 우리 자신의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기엔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영 안에서 일어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에서 비롯하는 수난의 신비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눈 똑바로 뜨고 봅시다, 예수님 수난의 신비를. 몸이 아닌 영의 차원에서. 


유시찬 신부(예수회)

출처: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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